아르메니아의 변심? 미국과 군사훈련에 나서는 러시아 군사동맹 조직 CSTO 회원국
아르메니아의 변심? 미국과 군사훈련에 나서는 러시아 군사동맹 조직 CSTO 회원국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9.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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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구소련권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각각 설립한 경제 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CIS 5개국)'과 군사 협력 조직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CIS 6개국)'의 핵심 회원국인 아르메니아의 친서방 노선으로 러-아르메이나 관계가 무척 껄끄러워졌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주변국에 신경을 쓸 틈이 없는 사이에 안보 불안을 느끼고, 친서방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르메니아의 안보 불안은 근본적으로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것이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끼여 유럽과 아시아(중동)을 잇는 '육상 통로'나 다름없는 '카프카스 지역'에 위치한 아르메니아는 2004년 장미혁명 이후 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선 그루지야(조지아)와 튀르키예(터키)계 이슬람권인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카프카스 3국'을 이룬다. 남쪽으로도 터키, 이란과 국경을 접한다. 또 그루지야와는 정교회 주도권(그루지야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놓고 갈등이 없지 않다.

아르메니아의 위치(표시). 흑해(왼쪽)과 카스피해 사이에 낀 '카프카스 3국'의 하나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 이란과 국경을 접한다/네이버 지도 캡처
캡처2-아르메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도 stylishbag.ru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위치(붉은 색 주변 지역). 왼쪽이 아르메니아. 2020년 전쟁으로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많은 땅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넘겨줬다. 남은 지역과 아르메니아 본토를 잇는 육상 통로가 '라친 회랑'(붉은 색과 아르메니아가 이어지는 부분, Лачинский коридор, Lachin Corridor)이다/사진출처:stylishbag.ru

가장 큰 안보 불안은 역시, 오랫동안 아제르바이잔과 민족·종교적 분쟁을 벌여왔던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둘러싼 지역 갈등이다. 아르메니아는 지난 2020년 9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제르자이잔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2개월 여만에(11월) 사실상 '항복 문서'(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상당한 땅을 넘겨줬다. 당시 휴전 중재자는 푸틴 대통령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안보 불신은 그 때부터 싹 튼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주도의 군사협력조직인 CSTO에 일찌감치 가입한 것은 아제르바이잔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CSTO는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 CIS 국가들의 군사·안보 협력체로 출범했으나, 2002년 회원국이 안보를 위협당할 경우, CSTO 전체가 개입하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로 탈바꿈했다. 일부 외신에서 러시아가 주도하는 '나토'(NATO)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러시아와 CSTO는 회원국인 아르메니아가 비회원국인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였던 지난 2020년, 전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고 양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에야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데 그쳤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모습.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탱크 공격(위)으로 나섰으나,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산 '바이락타르 TB2' 드론 등으로 적 탱크와 포대를 파괴했다(아래). 전장을 지배하는 드론의 위력은 2020년 전쟁에서 처음 확인됐다/사진출처:양국 국방부

당시 전쟁을 이끌었던 니콜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평화협정 체결 후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 요구에 시달렸다. 정적인 사르키샨 대통령은 평화협정 체결 직후, 파쉬냔 총리를 향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파쉬냔 총리에게 권력을 넘겨준 사르그샨 전 대통령 측도 지지세력을 동원해 수도 예레반에서 총리 퇴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 2018년 5월 아르메니아식 '벨벳 혁명'(1989년의 체코 민주화 혁명/편집자)을 통해 친러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파쉬냔 총리도 야당 측의 대규모 시위로 정권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조기 총선을 통해 기사회생했고,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입지를 감안해 러시아와 군사 협력 관계를 계속해 왔다.

하지만, 파쉬냔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자국의 외교 안보를 앞으로 러시아에 전적으로 기댈 수는 없다는 현실을 통감한 듯하다. 나토의 군사 지원을 등에 업고 1년 6개월 이상 러시아군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국가 안보 체제에 대한 '발상'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파쉬냔 총리가 최근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와의 인터뷰에서 안보 분야에서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인정하고, "안보 다각화에 나설 것"이라고 주창한 이유다.

아르메니아의 안보 노선 변화는 '미국과의 군사훈련'이라는 파격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아르메니아 국방부는 지난 6일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 'Eagle Partner 2023'을 11일부터 20일까지 국제평화유지군을 위한 '자르' 훈련장에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훈련의 목적을 "국제 평화 유지 임무에 참여하는 부대의 상호 운용성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국제 평화 유지 임무를 준비하는 군부대는 종종 파트너 국가와 합동 훈련을 실시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러시아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미국과의 군사교류 확대로 해석할 게 분명하다.

더욱이 군사훈련이 공표될 즈음, 나토 확장을 유럽 위원회의 군터 펠링거 위원장이 아르메니아를 향해 나토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촉구했다. 이에 바한 코스타냔 아르메니아 외무차관이 "아르메니아는 이미 나토와 협력하고 있으며, 계속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에 앞서 5일에는 러시아 주도 CSTO의 상임 전권 대표인 빅토르 비야고프를 소환한 뒤, 그를 주네덜란드 대사겸 화학무기금지기구(CTBTO)의 상임 대표로 보냈다. CSTO 대표를 공석으로 둔 것이다.

2022년 12월 키르키스 비슈케크에서 열린 EAEU 정상회의 모습. 가장 왼쪽이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 오른쪽 두번째가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그뿐만 아니다. 아르메니아는 지난 1일 푸틴 대통령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로마 규정 비준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비준되면, 푸틴 대통령이 군사동맹국이나 다름없는 아르메니아 방문시, 체포될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뒤이어 파쉬냔 총리의 부인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했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6일 "아르메니아에서 진행되는 아르메니아-미국 합동 군사 훈련이 크렘린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며 "러시아는 이를 심층 분석하고, 상황 전개를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틀 후(8일)에는 러시아 외무부가 아르메니아 지도부를 향해 '일련의 비우호적 조치'를 취했다고 비난했다. '비우호적 조치'로는 △국제형사재판소의 로마 규정 비준 절차 시작과 △총리의 부인 안나 아코뱐의 키예프 방문, △미국과의 합동 군사 훈련 실시 계획을 들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또 바가르샤크 하루투냔 주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엄중 항의했다.

아르메니아의 퍼스트 레이디 아코뱐/사진출처:페북 @anna.hakobyan.7965

아르메니아의 노선 변경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이 2020년 평화협정 체결 당시 아르메니아 본토와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잇는 유일한 통로인 '라친스키 회랑'의 폐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CSTO 평화유지군에 의해 안전이 확보된 이 회랑마저 막히면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완전히 아제르바이잔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아르메니아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아르메니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부정하면서도, CSTO가 '아르메니아를 포기했다”고 탄식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의 갈등 확산을 막으려는 분위기도 아르메니아에서 감지된다. 알렌 시모냔 국회의장이 러시아 외무부의 비난 성명에 발끈했지만, 집권 여당 소속 의원들은 "나토 가입이 기술적, 정치적 이유로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집권 여당의 사르기스 한다냔(Саргис Ханданян)의원은 7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나토 가입을 희망한 적이 없다"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르메니아 집권 여당 소속 의원 사르기스 한다냔/사진출처:페북 @khandanyanssrgis

이웃국인 그루지야가 섣불리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른 바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알고 보면, 나토 가입이 전쟁의 단초가 된 게 아닌가? 아르메니아로서는 신중하게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안나 아코뱐 여사의 키예프 방문도 '정신 건강'을 주제로 한 '퍼스트 레이디와 젠틀맨 서미트'(Саммите первых леди и джентльменов) 참석을 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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